3. 독일
독일 과학의 특징을 보기위해 이 질문을 떠올려보면 될 것 같습니다. 독일 최고의 명문대학은 무엇인가? 일본의 경우 문과는 동경대, 이과는 교토대. 중국의 경우 문과는 북경대, 이과는 청화대. 영국의 경우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프랑스는 그랑제콜. 그러나 독일은 딱히 어느 한 대학을 그 나라의 대표주자로 내세우지 않고 엇비숫한 수준에서 경쟁하죠. 물론 수도 베를린 대학(예전에 훔볼트 대학이라고도 합니다)이 유명하지만 뮌헨 대학, 라이프치히 대학, 괴팅겐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 본 대학, 프랑크푸르트 등등 만만찮은 대학이 많습니다. 이는 유럽을 여행할 때도 마찬가진데 영국하면 런던, 프랑스 하면 파리, 체코 하면 프라하, 오스트리아 하면 빈으로 상당수 문화유산이 수도에 집중되어 있지만 독일과 이탈리아는 딱히 집중된 도시가 없어 여행코스 잡기가 무척 어정쩡합니다.
이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역사적 상황 때문인데 오스트리아가 기원인 400여년전 독일과 네덜란드를 지배하던 국가는 ‘신성로마제국’과 선제후(강력한 지방귀족쯤으로 보면 됩니다)들이었는데 종교를 명분으로 삼은, 그러나 실제는 정치적인 30년 전쟁으로 독일 국토는 초토화가 됩니다.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쑥대밭이 됩니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오스트리아 군대가 30년동안 번갈아가면서 국토를 쓸고 지나가죠. 이 전쟁후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네덜란드, 스위스는 독립하고, 독일 땅에서 캘빈, 루터파의 개신교는 카톨릭에서 종교적 자유를 획득하고 역시 조약에 따라 독일국토는 수백개의 공국과 자유도시로 나눠져 고만고만한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독일 그림동화책의 산넘어 이웃나라 왕국은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이야깁니다 ^^ 서울의 한 동(洞)이나 구(區) 크기의 나라도 많았죠) 그중 큰 공국의 수도가 앞서 말한 독일의 주요 대학도시들이 됩니다. 프로이센은 베를린을, 바바리아 공국은 뮌헨, 작센은 드레스덴을 기반으로...
근데 이 산만한 공국의 연합체가 국가간 이동을 가로막는 경직된 그런 스타일이 아니라 나름 공국간의 왕래는 자유로왔고(물론 물자의 이동에는 세금이 붙어 무역에는 최악이었지만) 학자들의 이동은 더더욱 자유로와서 나름대로 경쟁체제를 띠게 됩니다. 우리야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가문의 영광이고 지역의 영광이고 국가의 영광이라지만 당시에는 자신들의 공국에 위대한 학자와 예술가가 있다는 것이 비숫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죠(오늘날도 독일의 각 소도시를 가면 괴테가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뿌듯해하고 관광상품으로 팔아먹는데요 ^^) 그래서 각 공국들은 FA를 획득한 프로야구 선수를 스카웃하듯 뛰어난 학자들 초빙하고 지원하는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뿐일까? 영국, 프랑스와 달리 독일에서는 오늘날 지도교수와 조교에 대한 개념이 있었는데 교수 밑에서 학위를 받은 제자는 바로 독립하는게 아니라 사강사라고 교수 밑의 교과과정을 담당하고 교수가 은퇴하면 그 자리를 잇는 형태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박사후 연구과정(포닥)과 비숫한데 이는 교수와 제자의 관계가 1회성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공동연구의 형태로 유지되고 학파의 형성에 유리했겠죠.
이런 유명한 스승과 제자의 계열, 그래서 스승이 은퇴하면 교수직을 다음으로 넘겼는데 역사상 쟁쟁한 학자들이 그 자리에 연속적으로 앉게 되어 학문적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됩니다. 가령 괴팅겐 대학의 경우를 보면 가우스 > 디리클레 > 베른하르트 리만 > 펠릭스 클라인 > 힐베르트 , 민코프스키 , 헤르만 바일, 막스보른(원자탄의 아버지라는 오펜하이머도 괴팅겐에서 공부했습니다) 으로 이어졌고, 베를린 대학의 경우 키르히호프의 후임으로 막스 플랑크가, 플랑크의 후임으론 슈뢰딩거가 물리학과 교수직을 이어 받게 됩니다. 뮌헨 대학의 좀머벨트의 밑에서는 볼프강 파울리, 하이젠베르크같은 제자가 나오죠.
노벨상을 받기위해 대학자 밑에서 공부하고, 쟁쟁한 세미나 그룹에 참석해서 그들과 공동연구를 하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진리 아닌 진리는 이런 독일의 학문적 계보에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지방 분권형 대학의 발전, 학자들의 대학간 자유로운 왕래, 위대한 학자를 따라서 전국에서 뛰어난 제자가 몰려드는 현상, 학위후에도 스승밑에서 계속해서 공부를 하며 공동연구 및 학문을 갈고 닦는 시스템 외에도 독일은 프랑스보다 한층 강화된 국가주도형 과학기술 지원을 발전시킵니다. 1870년대 카이저 빌헬름과 수상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을 통일시킨 후 부국강병을 위해 과학기술에 집중투자를 하는데 당시 독일 권력의 1인자야 카이저, 2인자는 비스마르크라면 3인자가 베를린 대학의 총장이고 ‘에너지 보존법칙’을 세운 헬름홀츠란 소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각지의 연구성과를 통합하고 지원을 체계적으로 하는 ‘카이저 빌헬름’연구소를 세운 것도 이때 였구요(2차 대전 이후 막스플랑크 연구소 명칭이 바뀌는데 본원외에 독일 각지에 30여 군데의 분원이 있는 연구소 복합체입니다. 당연히 노벨상 수상자가 수십명이나 되고 ^^)
이런 국가의 대학에 대한 큰 장악력 때문에 독일 대학 교수들은 준 공무원 신분이었습니다. 이게 한편으론 교수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와 지원을 약속할 수 있지만 자유로운 연구와 비판적인 생각에 대한 억압이 될 수도 있는게 히틀러의 나치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독일전역의 유태인 교수를 모조리 해고하고 추방할수 있었던 이유역시 교수 신분이 공무원급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중앙통제적 독일에서 국가의 눈밖에 나 교수직을 박탈당한다는 것은 더 이상 연구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우스와 리만으로 시작해 힐베르트까지 이어진 수학의 전통 그리고 당시 양자물리학을 주도했던 유럽 최고 대학이었던 괴팅겐은 이런 교수들의 망명으로 괴멸적 타격을 입고 다시는 그 전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뛰어난 동료교수와 제자가 하나둘 떠나는 것을 보고 힐베르트가 이렇게 말했죠.
“괴팅겐의 수학 말씀입니까? 그런 건 더 이상 없습니다”
4. 미국
앞서 영국, 프랑스, 독일로 갈수록 중앙 집중화(국가의 지원) 경향이 강화되고 이는 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미국에서는 이게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왜냐면 땅이 터무니없이(?) 넓다보니 중앙 정부나 중앙 과학기관에서 일괄적으로 전국의 과학을 통제하고 조율할 수가 없었거든요. 따라서 중앙정부보다는 각 주정부가 자신의 지역사정에 맞는, 기초과학보다는 보다 실용적인 응용과학에 집중 지원을 합니다. 가령 농업이 주요 산업인 중부지방(일리노이, 캔사스)은 농학과 기상학이, 서부의 캘리포니아등은 광산개발 및 지진에 민감하므로 지질학이 발달(지진의 규모를 나타내는 리히터란 단위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연구하던 찰스 프랜시스 리히터의 이름을 따서 만든 척도입니다)하는 식으로요.
그러나 이런 실용적이고 지역에 따른 과학발달은 2차 대전중 군부가 등장하면서 성격이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알다시피 현대전쟁은 총력전이고 전쟁무기의 개발에 국가 자원을 총동원하는 형태를 띠게 됩니다. 2차대전 전후의 연구 메카를 보면 Caltech(칼텍 : 캘리포니아 공대)의 제트추진연구소(JPL-고체연료 등 로켓의 추진체 연구로 독일의 V2 로켓 기술을 흡수) , MIT 래드랩(Radiation Laboratory. 레이다의 연구 개발로 전쟁중엔 4000여명의 물리학자, 엔지니어등 직원이 활동했으며 맨하탄 프로젝트처럼 전쟁 기간중 임시 연구 프로젝트로 전쟁 후 링컨연구소, 계기 연구소등으로 변함), 링컨연구소(Lincoln Laboratory - 대공 레이다 시스템 연구)와 계기연구소(Instrumentation Laboratory - 대륙간탄도 미사일을 제어하는 관성유도 항법 시스템), 시카고 대학 및 버클리 대학의 원자로 및 방사선 연구등이 그러합니다. 또한 1950년 국립과학재단(NSF)이 생기는데 군과 과학재단이 과학연구의 지원의 양대 축으로 작용합니다. 후에 수소폭탄의 개발, 나사(NASA : 미항공우주국), 아폴로 달탐사 계획, 인터넷의 전신인 아르파넷(ARPAnet) 역시 전쟁중 군부대와 군부대 사이의 통신연락 연구가 그 기반이 되었습니다.
과학재단, 군대 외에 과학연구 지원의 한 축을 더 언급하자면 기업입니다. 유럽에서는 아무리 큰 부자라고 하더라도 직접 대학을 설립하는 일은 드믈었지만 미국에서는 그 사례가 흔합니다. 이공계 위주로 나열하면 컴퓨터 공학으로 MIT와 양대 기둥을 이루는 카네기 멜론은 철강 재벌인 ‘앤드류 카네기’가, 시카고 대학은 석유산업 트러스트를 세운 ‘록펠러’가, 스탠포드 대학은 대륙간 횡단철도로 큰 돈을 번 ‘릴랜드 스탠포드’가 세운 대학입니다. 스탠포드 대학의 설립에 대해 일찍 죽은 자식을 사랑하는 애뜻한 부성의 일화니 말들이 많지만 릴랜드 스탠포드는 동시에 무지막지한 기업가로서 대륙간 횡단 철도 건설시의 과도한 노동으로 수많은 중국 화교들이 죽어나가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목화산업은 흑인의 노동력으로, 철도 부설산업은 중국인 이민자로 이루어진 산업이랄 수있는데 그때 화교들의 후손이 오늘날 샌프란시스코에서 화교촌을 이루는데 샌프란시스코의 유명한 금문교는 태평양으로 지는 석양에 붉게 물든 다리의 아름다움이기도 하지만 금문교 건설당시 태평양바다로 무수히 떨어져 죽은 사람들의 핏빛을 의미하기도 한답니다
대학의 초기 발전단계에서 기업가 개인이 공익적 목적으로 대학을 세운다면 기업들은 실용적 목적으로 자체 연구소를 설립하여 산업에 필요한 연구를 수행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IBM의 왓슨 연구소(노벨상 수상자 5명 배출), AT&T의 벨 연구소(노벨상을 11명이나 배출했는데 가장 가장 중요한 것은 업적은 트랜지스터의 발명), 듀퐁 연구소(나일론과 각종 합성섬유의 개발), 복사기로 유명한 제록스의 팔로알토 연구소(주로 공학 위주로 컴퓨터의 마우스 장치, 텍스트 대신 아이콘을 사용하는 GUI-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레이저 프린터의 아이디어가 이곳에서 처음 나왔음) 등이 대표적인 사례죠.
투박하게나마 이제껏 보았던 과학연구의 흐름은 처음엔 영국식으로 개인이, 어떤 조촐한(?) 협회가 주도하다가 과학의 중요성을 깨닫은 국가가 개입하는 프랑스 식이, 공동연구와 학파 및 각 연구기관을 조율하는 독일식의 체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강한 자금을 가진 군대의 거대과학, 마지막으로 기업이 직접 과학연구를 하는 미국식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가장 박사급 연구인력을 많이 확보한 연구기관은 대학이 아니라 수원에 있는 ‘삼성 종합기술연구원’이고 70년대 카이스트가 프랑스의 그랑제콜을 모델로 국가가 설립한 연구기관이라면 포항공대(포스텍)는 보다 미국식으로 포항제철이란 기업이 칼텍을 모델로 설립한 대학입니다. 나아가 삼성은 성균관대에 반도체학과 휴대폰학과라는 기업부설 연구인력 양성소(???) 같은 요상한 교육기관을 만들었으니까요.
어느쪽이 보다 바람직한 형태인지 가치판단은 이 글의 주제를 넘어서지만 어느 경우에도 과학 기술과 그 성과가 전문가 집단만의 독점물로 남아서는 안되고(왜냐면 과학 연구란게 앞에서 보았듯 엄청난 국가의 자원과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과학 기술에 대해 시민사회의 감시와 관심을 차단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등골이 서늘한 SF 영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각종 도청기술, DNA 복제, 유전자 변형 식품등 현재의 과학연구만으로도 그 파급효과는 과학자 집단, 연구소에 한정되는게 아니라 사회전체로 미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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